2008년 08월 27일
샤토 쉬뒤로(Ch. Suduiraut) 1982년




기념할 일이 있어 큰 마음을 먹고 며칠전에 개봉한 샤토 쉬디로 1982년산입니다.

구입할 당시에 표지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그 휘에 곰팡이 제거제를 라벨만 따로 떼어 살포한뒤 랩과 같이 감싸 놓았습니다.

예전 근엄님께서 지적해주신 '82년은 소테른에서 좋지 않은 힘든 빈티지였다' 라는 말을 듣고 적잖이 실망했었습니다.

파커 아저씨도 이 년도의 소테른에게는 상당히 낮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와인은 좋은 빈티지든, 나쁜 빈티지든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배우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셀러에서 꺼내들었습니다.





바닥에 곱게 고여 있는 주석산 결정. 25년여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용히 쌓인 주석산을 볼때마다 그 와인의 나이테를 보는것 같습니다.






율러지는 이미 병목까지 내려가 있었습니다. 구매 당시에도 율러지가 낮아 있었고 코르크도 이미 그 수명을 한계까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일 포터로 캡을 벗겨내자 나타난것은....






와인의 최대의 적. 곰팡이였습니다.

어찌나 그리 곱게 붙어 있던지. 한동안 멍 하니 코르크만 바라 보았습니다.


'이것이 TCA 감염인가...'


하지만 이미 열어버린 포일캡. 다시 넣을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대로 코르크를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코르크 상태는 예상대로 나쁜 편이었습니다. 다행이 갈라지지는 않았지만 습한 곰팡이 냄새. TCA 감염이 진행되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테이스팅.

올드 빈티지 소테른에서 올라오는 강한 향취가 아닌, 거의 무취에 가까운 습한 냄새가 올라 왔습니다.

하지만 TCA 감염 특유의 젖은 신문지 내음, 곰팡이 악취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안으로 넣은 와인은 소테른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닫혀 있었습니다.

흡사 프리미에 코트 뒤 보르도 슈페리에 와인을 일찍 마셨을때와 비슷한 닫혀 있는듯한 맛.

'혹시나 이것은 닫혀 있는, 아직 깨어있지 않은 와인인가? 26년이 지났는데?'

행여나 하는 마음에 진공 펌핑을 하고 다시 셀러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번주 토요일.



사흘이 지난 오늘, 다시 마개를 열고 잔으로 따라 부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코로 가져가자 살랑이는듯한 감귤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월링을 하고 다시 코를 깊게 넣어 향을 들여 마셨습니다.



26년의 세월을 깨고, 쉬디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곰팡이에 감염되고, 잘못된 보관으로 라벨에 곰팡이가 끼어도, 위대한 와인은 그런 격정을 딛고 일어나듯이 쉬디로는 자신의 모습을 아낌없이 내 밀었습니다.

순식간에 테이스팅 글라스를 비워버리고, 다시 한잔.

아직은 표현할수 없는 몇가지 향.
그 속에 느껴지는 감귤향, 미놀린, 버터 스카치, 약간의 아몬드향과 복숭아 향. 그리고 꿀을 농축한듯한 단맛과 아직까지 튼튼한 신맛.

괴연 이것이 실패한 빈티지라고도 불리는 1982년의 소테른 와인이 맞나...

한동안 생각하고, 다시 와인을 홀짝이며 인터넷으로 검색했습니다.

답은 의외로 가까운곳에 있었습니다.

1982년, 샤토 쉬디로에서는 특별한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Crème de Tête 라고 불리는 스페셜 퀴베.

Cuvée Madame의 첫 빈티지가 1982년이었습니다.

왜 1982년을 최고의 포도가 수확된 완벽한 상태의 와인에게 부여하는 Cuvée Madame의 첫 빈티지로 만들었을까요.

몇몇 사이트를 뒤져보고, 더이상 확실한 해답은 찾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쉬디로에 있어서는 1982년 실패한 해가 아니라는것이었습니다.


힘든 환경은 사람도, 와인도 그 본질을 뒤흔들 경우가 많습니다.

태어난 환경, 자라난 환경, 살아온 환경...

그 험난함은 많은 상처를 남기겠지만, 그 근본에 충실하게 되면 사람이든 와인이든 귀중한 속모습을 가지게 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유난히 와인이 당기는군요. 하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마실 사람이 없는게 참 아쉬운 밤입니다.



by 리스 | 2008/08/27 00:58 | 취미 - 와인&사케&맛집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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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IEATTA at 2008/08/27 01:17
오오 왠지 만화책을 그리셔도 될듯한.... (탕!!)
Commented by MANIAC at 2008/08/27 02:27
어서 소믈리에 자격증을.
Commented by 모모맨 at 2008/08/27 03:46
다 필요 없이 사또 디켐를 오픈해 주세요.
Commented by noongom at 2008/08/27 08:43
멋진 역전극 같은 분위기네요.
멋집니다.
Commented by 리스 at 2008/08/27 10:57
IEETTA>
그림을 그릴줄 모르는지라. 헐헐헐. 글도 영...

MANIAC>
소물리에는 힘들어서리.

모모맨>
조만간 오픈 예정입니다만, 과연...

noongom>
네. 정말 역전극이었습니다.
Commented by hiko at 2008/08/27 12:51
표현력이 참 좋으신거 같네요~^^

저도 얼마전에 마트에서 싸게 파는 와인들에서 부쇼네를 경험하고 놀란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비릿(?)한 향이란....후.... 그래도 디켄딩하면 괜찮아지는거 같에요.
Commented by arbiter1 at 2008/08/27 20:10
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전 와인도 좋아하지만 최고는 역시 보드카나 데낄라로 치는지라...
Commented by 리스 at 2008/08/27 21:37
hiko>
네. 나아질때도 있고 살아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것 같습니다.

arbiter1>
리큐르도 맛있지요. 헐헐헐.
Commented by 마근엄 at 2008/09/01 01:03
힘겨운 세월을 살아온 올드 빈티지가 방긋하고 웃어주는 순간이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와인 외부의 곰팡이는 그리 문제되진 않습니다. 주요 와이너리들의
지하 카브를 보더라도 거미줄과 곰팡이, 먼지가 가득히 쌓인 채 보관
되고 있으니까요.

프랑스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 와인샵의, 자물통으로 채워진 셀러 속에
잠들어있던 100년 묵은 디켐은, 레이블이 잔뜩 우그러들어 있.....이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보니 그것은 우그러든 것이 아니라 뽀~얗게 앉아있는
곰팡이 덩어리들이었습니다. 곱게 쌓인 곰팡이는 습한 환경에서 움직이지
않고 잘 보관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하여간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리스 at 2008/09/01 01:41
마근엄>
감사합니다. 서울에 다시 올라갈때 곰팡이 핀걸 하나 들고가볼까요. 헐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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